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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갈비의 유래

작성자 고종국(ip:)

작성일 2006-05-18

조회 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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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근대적 한국음식점의 태동은 1907년 (이문설렁탕)으로부터 출발한다.
50년대 무교동의 추어탕집, 60년대 청진동이 해장국집, 오장동 냉면집, 70년대 장충동 족발집, 신림동 순대집, 무교동 낙지골목, 80년대 신당동 떡볶이집, 회기동 파전골목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있어서의 음식점의 발달은 한국 고유의 전통음식에 기반을 두면서 현대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변천을 거듭해 왔다. 79년에는 프랜차이즈가 처음 도입되었는데, 80 ~ 90년대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갈비는 가정집에서는 명절이나 잔치때가 아니면 갈비음식을 좀처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1939년경 서울 낙원동에 있는 평양냉면 집에서 낱개로 가리구이를 팔면서부터 쉽게 사 먹을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갈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냉면집은 서울에 사는 평안도 사람들이 즐겨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그 뒤 이름이 나서 한밤인 자정 때쯤이 가장 바빳다고 한다. 자정 때는 극장이나 요릿집, 카페, 바 등이 파하는 시간이다.




술 깨는 데에 냉면이 좋다하여 모여들었고, 요릿집에서 놀다가 찾는 무리도 많아서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에는 냉면 한 그릇에 20전, 특제가 30전이고, 갈비 한대가 20전이었는데, 갈비는 연한 암소 갈비였다. 냉면을 보통으로 시키고 갈비 두대를 시켜 먹으면 모두 60전이다. 이 냉면집 덕책에 서울 시민은 짝으로 사지 않아도 가리구이를 먹을 수 있었다.



1950년대



6.25 전쟁의 폐허를 복구해 갔으며 전쟁 전 기존의 식당들도 다시 문울 열개 되었다. 당시의 서울의 음식점 수는 170여개로 추산되며 대부분 대중 음식점이었고 밥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갈비구이를 취급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1957년 서울 근교 벽제에다 갈비집을 개업하였다. 평소에 수원의 화춘옥에 자주 들러 갈비를 먹고 가곤 하였는데 언젠가는 갈비집을 해야겠다고 다집한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라 한다. 그곳을 벽제갈비라 하고 벽제갈비 옆에 늘봄농원이 개업하였고 점차 서울로 뻗어가게 되었다.



1960 ~ 1970 년대



1963년경부터는 본격적인 갈비집으로 야외 예식장으로 공원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장흥 유원지와 연계되어 관광 유원단지가 되었다. 처음 벽제에 갈비집이 생기자 서울의 식도락가들은 벽제에 가서 갈비를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서울의 기존 식당 등에서도 이때부터 갈비를 취급하기 시작하게 된다.



1930년대부터 일반 대중식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서울을 예로 들면 용금옥, 한일관, 청진옥, 조선옥, 안동장, 남포면옥, 하동관, 낙동강, 한국회관, 삼오정 등이며 이후 진고개 일억조, 대림정 등이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말까지 한강 이북지역에서 이러한 식당들은 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업소의 주방장들은 대부분 요정 출신들이며 갈비구이라는 색다른 방법의 조리를 취급하게 된 것은 60년대 이후였다.




이와 같은 식당에서의 기존 메뉴는 대부분 불고기, 갈비탕, 설렁탕, 곰탕 변형된 어복쟁반, 추어탕 등 전골류의 식사가 많았으며 당시의 영업형태는 한일관 진고개 일억조 등은 한식뿐 아니라 일식을 함께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일억조는 한 건물에 한식, 일식, 양식을 같이 개업하여 영업하였다.



그러다 90년초에 서울 중심권의 장사가 사양길에 접어들자, 금호그룹에 매각하여 지금 그 자리에는 금호그룹 건물이 버티고 있다. 서울의 강북지역에 있던 모든 식당들은 1930년대 부터 70년대 말까지 장사가 잘 되었다. 특히 60년대부터 갈비구이를 취급하기 시작한 이후에 장사가 더욱 잘 되었다. 이렇게 갈비구이라는 메뉴가 수원에서 벽제로 벽제에서 서울 중심권으로 이동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0년대



197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강남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영동 개발과 함께 이 지역에도 식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한식당의 이름이 바뀌어 가는데 "가든"이란 이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 이름이 지금까지 가든, 파크, 공원이란 것을 간판에 쓰기 시작하였다. 식당의 규모는 대형으로 바뀌어 갔으며 전문적으로 갈비와 냉면만을 취급하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삼원가든이다.

1981년 개업하고 1982년에 늘봄공원이 개업하면서 점차 초성공원, 레팡가든, 남강가든, 서라벌 등 우후 죽순처럼 갈비 전문점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는 갈비전문점 어디를 가든 매을 동이 날 정도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이때 늘봄공원사장은 3개월만에 투자금액을 이미 회수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당시 늘봄공원에서 근무 인원을 보면 냉면부 인원만 십여명에 달했으며 찬모인원이 13명이었고 전체 종웝원수는 140명이었다. 육부실에서 갈비작업 조리사가 20여명이었다. 
삼원가든은 늘봄공원보다 규모가 컸음으로 종업원수는 더 많았다.



당시 삼원가든은 분점을 열고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당시에 주방장이었던 김 성진씨 말에 의하면, 갈비는 소 한마리에 두짝이 나오는데 100짝을 작업하였다고 하니 소가 50마리가 되는 것인데 40짝 50짝은 평균이었고 그 이상일때도 허다했다고 한다.당시의 삼원가든 주방장은 김성진씨와 절친한 친구사이 이기도하다. 이분은 80년대부터 갈비조리사를 양성한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수원갈비의 원조격인 이원길씨로 부터 김성진씨가 갈비를 배웠다는 사실이다.




이원길씨는 수원 화춘옥에서 갈비를 배운 원로 조리사로서 이분의 선배는 화춘옥에서 41년동안 근무한 문이근 이란 원로 조리사인 것이다. 이러한 갈비조리사의 인맥을 보더라도 갈비구이의 원조는 화춘옥이라고 할 수 있다.
갈비구이에 대한 연구는 조리사들에 의해서 그 맛과 모양세를 달리 시도 해 보고 소금과 간장을 병행해서 가장 이상적인 맛을 찾으려 한 것이다. 갈비의 모양세가 지금의 형태로 변형된 것은 서울 중심권과 강북지여에 있던 식당의 형태가 강남지역으로 넘어 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갈비를 한쪽으로만 뜨는 외갈비가 되었으며 다이아몬드 무늬를 이때부터 넣기 시작하였다. 강북지역에 있던 식당에서는
갈비를 양쪽으로 포를 뜨는 양 갈비로 재웠으며 갈비의 크기도 지금보다 약간 큰 편이었다. 고기의 두께도 좀 더 두껍게 떠서 재웠다. 현재는 갈비의 모양세가 비슷하게 전국 어디를 가보아도 평준화되었다.
이것은 영동지역에 대형 갈비집이 생기고 장사가 호황을 누리게 되니까 전국에 걸처 대형 갈비집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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